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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 스포주의 ※


난생 처음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

살면서 하루키라는 이름을 들을 일은 정말 많았지만 어쩐지 내가 나서서 그의 소설을 읽게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무튼, 하루키>를 읽고 나서 하루키의 소설을 읽게 된 셈이다.

 

#1. 하루키라는 작가에 대하여.

음... 솔직히, 워낙 여기저기서 하루키의 이야기를 하고, <아무튼, 하루키>를 읽으며 팬의 입장에서 먼저 그를 접해서 그런가, 왜 그렇게까지 유명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고, 단지 <노르웨이의 숲>이 나와 완전히 결이 맞는 소설은 아니어서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단번에 끌어들일 만큼 흡입력 있고 자극적인 소설은 아니어서일 수도 있다. 내 생각보다 훨씬 어두우면서 잔잔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서 뭔가 해소되지 않는 찝찝한 부분이 있지만 해설을 찾아보기보다 먼저 날것의 내 느낌을 적고 싶어 서평을 우선 쓴다.

 

<노르웨이의 숲>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나온다. 화자인 와타나베, 나오코, 레이코, 미도리, 기즈키, 나가사와, 하쓰미, 미도리의 아버지, 특공대까지, 살아가면서 보려면 볼 수 있고, 이런 사람도 있겠지 상상하면서 실제로 마주친 적은 없는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읽으면서 인물들은 모두 나의 일부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그랬다. 모든 인물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고,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내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내 주변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자기만의 어두움을 안고 현실 세계에 적응하는 척하며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2.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하루키라는 작가가 굉장히 많은 사유를 하며 살아간다는 게 느껴졌다. 그전에는 죽음에 관해서 그렇게 자세하게 생각해본 적 없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죽음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의 주변인들은 어떤 상처를 받고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걸까? 어렴풋이라도 공감할 수 없는 영역이다. 물론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나는 우울증을 겪으면서도 자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그 정도의 가벼운 우울을 가진 사람들이나, 혹은 살면서 우울을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고 쉽게 말할 수도 없는 그런 마음이겠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나약한 것일까? 혹은 오히려 용기 있는 것일까? 나오코의 말처럼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어딘가에 반드시 있는 어두운 우물 속으로 불가피하게 빠져 버리고 마는 것일까? 어쨌거나 하나는 확실하다.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상처를 주지 말 것. 그런 사람이 되려 노력하고 있다. 남들의 상처를 쉽게 논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 내가 다시 태어나 그 사람이 되어 보지 않고는 (물론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타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나오코가 결국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와타나베가 처음 아미 사에 다녀갔을 때에 그래도 나름 활기 있어 보이던 나오코가 점점 시들어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기즈키는 왜 그 어린 나이에 죽음을 선택했을까. 이해하기 어렵다. 작가도 아마 모든 사람이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3. 가장 좋았던 장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와타나베가 처음으로 아미 사에 방문한 삼 일 동안, 나오코와 대화를 나누고, 레이코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셋이 둘러앉아 포도를 먹으며 기타를 쳤던 장면들이었다. 아미 사에 대한 부분이 나왔을 때 내가 메모한 건 이랬다. "유토피아?.." 거의 유토피아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요양소에서 '환자'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새를 돌보고, 텃밭을 가꾸고,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들로만 식사를 하고, 자신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어느 누구도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 쉽사리 말하고 비난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의 뒤틀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으며, 저녁에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배우며 살아가는, 서로의 아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의무도 없는 그런 삶. 그런 곳에 가서 평생 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소중한 사람들이 나에게 면회를 와 준다는 전제 하에. 하지만 삶이란 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겠지. 내가 끔찍이 싫어하는 회사가 나에게 제공하는, 사회에 기여한다는 아주 작은 보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걸 바탕으로 내가 우울감도 느끼고, 사유를 하고, 하늘이라든가 산책길 나무의 푸르름, 야경의 아름다움도 느끼며 살아가는 거겠지. (그래도 적어도 반년 정도는 그곳에서 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밑줄을 치고 메모한 부분은 대부분 레이코 씨의 말들이었다. 가령,

"솔직히 말해 나는 좀처럼 알 수 없어요. 내가 나오코한테 한 행동이 정말로 옳은 거였는지 아닌지."
"그건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야. 나오코도 모를 거야. 그건 두 사람이 앞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결정할 일이 아닌가 싶어. 그렇잖아? 설령 무슨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지. 서로를 잘 이해한다면. 그 일이 옳은지 아닌지는 그다음에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양억관 옮김, 176p
"감정이 차올라서 울어. 괜찮아, 그건 그것대로.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거니까. 무서운 건 그걸 바깥으로 드러내지 못할 때야. 감정이 안에서 쌓여 점점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거지. 여러 가지 감정이 뭉쳐서 몸 안에서 죽어 가는 거. 그러면 큰일이야."
(중략)
"뭐든 솔직하게 말하도록 해. 그게 제일 좋은 거야. 만일 그 때문에 서로 얼마간 상처를 준다 해도, 아니면 아까처럼 누군가의 감정을 격앙시킨다 해도 긴 안목으로 봐서 그게 제일 좋아. (중략) 뭐든 솔직히 말해야 해, 여기에서는. 밖에서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잖아?"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양억관 옮김, 201p
"나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는데, 생각해 보니 나 자신을 위해 피아노를 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거야."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양억관 옮김, 211p
"환자와 스태프를 전부 바꿔도 될 정도네요."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 말대로야. (중략) 자기도 이제 점점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게 된 것 같네."
"그런 것 같네요."
"우리에게도 아주 정상적인 부분이 있어. 그건 우리는 스스로 비정상이란 걸 안다는 거지."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양억관 옮김, 256p

다시 돌아보니 위에 나열한 모든 말들이 레이코 씨가 한 말들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나열해 놓고 보니 정말 이 문장들만으로 나는 A4용지 열 바닥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하루키의 책은 이렇게 사유를 하게 해 줘서 좋은 걸까? 뭔가 계속해서 곱씹게 된다. 그냥 허투루 넘길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을 뭉쳐서 형체로 만들어 놓은 느낌. 물론 공감이 되는 내용도 있고, 나는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사실 섹스에 대한 내용이 너무 많이 나와서 거부감도 들었다. 내가 한국 사회에서 딱딱하기 그지없는 여고를 나와 그런 걸지 몰라도, 굳이 이렇게 남녀가 교감하기 위해,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을 채우기 위해 반드시 섹스를 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들을 했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정말 많은 여성들과 섹스를 하면서도 나오코와 미도리를 동시에 사랑하는데, 특히 이런 부분은 받아들이기 조금 어려웠다. 물론 살아가면서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말이 좀 샜는데, 위에 굵은 줄을 친 부분들은 모두 공감하면서 읽은 내용이다. 나는 스물다섯 살이 되도록 내가 진짜 원해서 뭔가를 한 적이 없었다. 취업을 하고 자격증을 딴 것도 내가 진정으로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사회에 내 모습을 끼워 맞추고 싶어서, 이상적인 여성이 되고 싶어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지금 방황하고 있다. 아직 답은 찾지 못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 뭘 좋아하는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사람들이 하루키의 책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심코 지나쳐 버린 부분을 사유하게 해 주니까.

 

#4. 솔직함과 나 자신에 대하여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레이코 씨가 말했듯 어느 누구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나만 해도, 모두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다르다. 회사에서는 까칠하고 싸가지 없는 여직원일 테고, 남자친구에게는 우울감을 호소하면서 공감을 바라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하면서도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하는 이상한 여자애, Y에게는 똑 부러지고 자기 것은 잘 챙기지만 우울을 가지고 있고, 그 우울함을 자기에게 다 털어놓고 싶어하지는 않는 친구일 것이다. 또 J에게는 조금 이기적이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머리 좋은 친구, 그 정도일 것이고, 가족들에게는 자기 세계가 뚜렷하고 늘 혼자 있고 싶어하는, 늦은 사춘기를 겪는 이해하기 힘든 여자애일 것이다. 그럼 내가 느끼는 나는 누구일까? 내가 느끼는 나는 정말 복합적인 사람이다. 어느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연약한 존재, 그 정도일까? 어쨌든 내 주변에서 보는 나는 어느 누구도 내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은 나의 일부만 보여주고, 나누고 싶지 않은 부분은 감출 뿐이니까. 회사에서의 어느 누구도 진짜 나를 모를 것이다. 손해보지 않으려 내 따뜻한 부분은 최대한 감추고 일부러 까칠한 면만 보이니까. 게다가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한다. 내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물론 일에서는 안 그렇다. 사생활 관련된 부분 말이다) 남자친구는 내가 이런 글을 쓰고 블로그를 따로 만들어 내 생각들을 담는 것을 전혀 모른다. 어차피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내가 비정상이라고 느낀다. 남자친구를 포함한 일반적인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생 왜 그렇게 복잡하고 피곤하게 살아? 그냥 생각을 안 해 버리면 되잖아. 네가 네 발목을 잡고 우울 속으로 일부러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어. 나와서 격한 운동을 해 봐." 이딴 말들. 제발 쉽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기를 나도 가장 바란다. 이런 말들은 전혀 힘이 되지 않는다. 생각을 안 하려고 하면 생각을 안 하게 되나?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살면서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낸 시간이 2%도 되지 않을 것이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잠자는 시간도 대부분 꿈을 꾸니 잠자는 시간을 포함해도 무방하겠다. 나도 그게 싫어서 죽어라 미라클 모닝을 하고, 아침 운동도 하고, 머리를 비워내려 글도 쓰는 것이다. 

아미 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나도 이해받을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저기는 유토피아나 다름없으니까. 서로의 뒤틀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당연하게 생각하며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곳은 그야말로 유토피아라고 난 생각한다.

 

#5. 나의 태엽

네가 매일 아침 새를 돌보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나의 태엽을 감아.
(중략)
일요일에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다.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양억관 옮김, 335p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나도 매일 아침 나의 태엽을 감는다. 매일 5시에 일어나 씻고, 명상과 요가를 하고, 시를 필사하고 모닝 페이지를 쓴다. 그러고 나면 그 때만큼은 삶의 의지가 생긴다. 그런데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일요일에 태엽을 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일요일엔 어떤 의무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의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세뇌당하며 살아왔다). 아미 사와 현실 세계의 가장 큰 차이가 뭐냐고 묻는다면 아마 "의무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란 왜 한 인간을 계속해서 죽이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을 선택하고 또 그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를 찾는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해 보이는 사람들도 내면은 상처입고 썩은내가 난다. (마치 나처럼. 오히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대단하다, 우리 엄마에게 저런 딸을 둬서 부럽다고 한다. 내 인생을 하루만 살고 나서도 나에게 부럽다고 너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누군가는 그래도 행복한 줄 알라고, 나에게 복에 겨웠다고 말할 테니까. 내가 진짜 복에 겨운 소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우리의 가장 큰 딜레마는, 살기 위해서 의무를 다해야(일을 해야) 하는데, 그 일들이 스스로를 계속해서 죽이는 게 아닐까. 나는 회사에 있으면 점점 나를 잃는다는 느낌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는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일이니까. 나라는 인간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그러니까 소모품처럼 대하고, 개인을 살피지 않는 것이다.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회사는 회사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한 방법을 찾은 것일 뿐이고, 취업규정에 동의하고 계약서를 쓴 순간 나는 그 체계에 동의한 것이니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기 때문에 죽어라 재테크 공부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좀 더 나이가 들면 이런 시스템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날이 올까? 그러나 상처에 무뎌지고 익숙해져서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일이 정말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태엽을 감는' 의식은 모닝 루틴이다. 이를 통해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책이 함께하면 더 좋고.

 

#6. 타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주는 행위에 대해.

어부가 가 버린 다음, 문득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잤던 여자 친구가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심한 짓을 했는지 생각하며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상처 입을지에 대해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양억관 옮김, 456p

나도 와타나베를 따라 가슴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올해 들어 많이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에게 상처 입히는 칼날 같은 말과 행동을 나는 얼마나 많이 저질렀던가.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줄 알았고, 가장 고귀한 것(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위해 잠을 줄이고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내가 나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것은 내 자유이니까. 그렇지만 나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한심하다는 식으로 말을 하면 안되는 거였다. 네 인생은 그 정도이지, 라는 투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다. 살아온 환경도 성향도 모두 다르니까. 그런데 나는 무슨 주제로, 그 사람에 인생에 관심을 가지거나 관여하고 도움을 준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쉽게 타인을 재단하고 평가했던 것인가. 같은 예로 영화 '소공녀'를 보면서, 나는 미소의 슬픔에 공감한 것이 아니라, 정미나 문영이 미소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의 나 같아서 울었다. 무지한 나로 인해 상처받은 미소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미안해서. 그리고 내가 내뱉은 말들이 전부 기억도 나지 않아 그게 더 죄스러워서.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앞으로는 나 때문에 누군가 상처받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 그래서 말을 줄였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내가 그랬던 건 무지했던 것이다. 내 무지로 인해 타인이 상처받지 않도록 더 배우고 더 사유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7. 마치며

이렇게 길게 서평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 거의 한시간 반을 붙잡고 있었다. 그만큼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었던 것 같다. 서평을 쓰고 나서야 하루키의 책이 왜 좋은지 알 것 같다. 아마 인생을 살아가면서 위기를 더 많이 겪고 내 자신을 갈게 되면, 그 다음에는 책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지겠지. 그 다음에는 더 울고 웃고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